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달라이 라마 13세 (문단 편집) === 친정의 시작 === 1882년, [[판첸 라마 8세]]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를 물색하다가 1892년, [[판첸 라마 9세]]를 찾아 자신의 제자로 삼았고 법명을 지어주었다. 1895년 1월, 달라이 라마는 비구계를 받고 8월 8일부터 친정을 실시하였다. 당시의 달라이 라마 13세에 대해 프랑스의 학자 클로드 르방송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. ||그는 예리한 지성, 불같은 기질을 다스릴 줄 아는 신중함, 정치적 통찰력 등 비범한 재능을 가진 명석하면서도 젊은 승려였지만 한편으로는 적도 많아, 심지어 주변 사람들 중에도 적들이 있었다.|| 당시 포탈라 궁에는 달라이 라마 13세에 대한 험악한 분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네충사의 신탁승이 두번이나 달라이 라마 13세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신탁을 내리기까지 했다. 1899년 7월, 달라이 라마 13세는 즉각 이 신탁승을 라싸로 소환하여 자초지종을 캐물었고 신탁승은 달라이 라마의 전 섭정 데모 틴레 랍갸스가 쇠걀 등과 모의하여 달라이 라마를 해치기 위한 마법을 걸었다고 신탁을 내렸다. 이 사건은 '마법 걸린 신발 사건'으로 번졌고 달라이 라마 13세는 데모 틴레 랍갸스와 쇠걀이 자신을 해치기 위해 신발에 마법을 건 혐의로 체포하여 종신형을 선고했다. 달라이 라마는 병기창을 건설하는 등 티베트의 근대화를 시작했으며 러시아를 끌어들여 영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설정했다. 1898년, 달라이 라마 13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부랴트족의 라마 아왕 로장을 러시아로 파견했으며 1901년, 러시아 궁정에 최초로 공식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는 [[인도 제국]]과 영국을 크게 자극했다. 1902년에는 판첸 라마 9세에게 비구계를 주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